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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가 대표적 작품과 이해 본문

민's STORY/공부

근대 건축가 대표적 작품과 이해

싼티박 2010. 4. 13. 00:36

* Frank Lloyd Wright

라이트는 유럽 중심의 근대건축의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유럽건축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자존심이었다.

라이트의 위대한 시작(1889-1898) 1887년에서 1893년까지 그는 Adler와 Sullivan의 사무소에 고용되었다. 그는 그의 소중한 스승인 설리반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원리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이트는 태어나서 처음 20년을 위스콘신의 남서부에서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육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었다. 그의 어머닌 라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식이 남자아이일 것이며 그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독일 교육자인 프래드리히 프레벨에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프레벨은 자연을 모방하게 시키기보다는 나무 상자, 큐빅 그리고 구들을 이용해 확장시키면서 시각 훈련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 이었다. 또한, 삼촌의 농장에서 라이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시골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러스킨과 비롤레 르 뒤크를 독서를 통해서 알게 되어, 그들로부터 이론적 영감을 많이 받았다. 맥킴, 미드 & 화이트는 물론, 동부 해안 지역의 H.H 리차드슨과 B. 프라이스의 작품들에서 건축 상의 모델을 발견했다.

그가 스스로 건축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가 애들러와 설리반 밑에서 배웠던 것과는 색다른 주거 건축을 시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사무실을 연지 6년 만에 그는 주거 건축의 디자인을 변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삶의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냈다.

이러한 혁명적인 스타일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되어지기도 했던- prairie house라고 부른다. 현재의 집들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창문은 벽에 난 작은 구멍과 같고, 재료는 나름대로의 성질을 살리지 못하고 쓰여지고 있다. 주거 건축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프래리 하우스를 개발했다.

그는 대평원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길고, 낮은 라인을 형성하는 주택을 원했다. 그는 다락방과 지하실 을 없앴으며, 지붕 선을 조용하고 우아하게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본능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주거라도 shelter(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가 본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고 넓게 퍼지는 지붕을 설치했습니다. (그것이 납작하거나 어떻든 간에) 나는 건물을 동굴이 아니라 넓고, 그 장소와 관련된 하나의 shelter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난 땅과 평행한 면이 그 자신을 땅과 경계지으면서도 건물이 땅에 소속되게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개념을 건물에 넣었습니다.

그가 prairie house를 짓는데 있어서 뚜렷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건축주의 요구와 그 땅의 언어에 맞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집이 [box]형태로 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이 말은 즉, 방은 서로 불필요한 벽과 문을 없애서 방끼리 서로 유동성 이 있어야 하고 부드러운 유리 영역을 통해 빛과 공기가 흘러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라이트에게 유럽으로 가 보라고 권했으나 그는 계속 거절했다. 하 지만 마침내 1909년 라이트는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건축을 연습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는 베를린에서 라이트의 작품집을 제작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이 여행은 진정 하 나의 이동이었다. 그의 아내와 가족들을 Oak Park에 남겨 두고,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는 닫은 채, 그리고 진행 중이었던 그의 작업들은 아래 사람들에게 물려준 채 그는 갔다 온 것이다.

1905년과 1913년에 라이트는 일본에도 갔다. 그는 일본의 문화들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 1923-25년경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을 때, 1933년에는 공업 60, 건축 14, 고용 61, 노동자 임금 38이라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경제 공황은 국가의 가능성과 국가성을 재평가하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라이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과 미국 중산 가정이 살 수 있는 housing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Broadacre City와 Usonian House가 제안되었다. Usonia라는 단어는 1925년 라이트의 기록물에 최초로 나온다.

* 건축에 나타난 Frank Lloyd Wright의 사상

세기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위스콘신주 리릴랜드 센터에서 1869년 6월 8일 음악가 겸 목사인 윌리암 C. 라이트와 웨일즈 출신의 안나 로이드 라이트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생 동안 프로젝트를 포함한 800여개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건축을 시작한 이래 은퇴 없이 생애를 마칠 때까지 작업에 몰두한 철인이었으며 일관된 건축적 사고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언어를 정립하였다.

자연에서 추출된 그의 건축적 모티브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직관은 자연의 자태에서 형상화된 구조의 시스템을 비롯하여 형태,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입, 수직 과 수평의 상호 연관관계 및 연속과 확장, 반복 및 대립의 관계로 이어져 각각의 개체가 결합되면서 일체로 표현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의 맥을 이루고 있다.

라이트는 그가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 당시 시카고학파의 거장인 루이스 설리반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미라는 것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하고 있다는 유기론(자연적이며 생물적인 것으로 유기적 인간성으로 연결되며, 서로 완전히 분 리될 수 없는 사상이나 사물의 파악)을 계승 발전시켰다. 라이트는 140개 정도의 주택설계, 50에 가까운 계획안 등 다작의 주택 설계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건물의 진실성은 건물의 지붕과 벽에 있는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 수 있는 내부공간에 있음을 제시 했다.

초기의 계획에서는 좌우대칭의 엄격한 고전주의(classicism)에 의하여 구성하였으나 묵직하고 평면 및 단면을 단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유틸리티 코어(utility core: 주방, 세탁실, 화장실 등 물 쓰는 공간을 한데 모아 설비에 대한 처리를 간편하게 함)가 주택의 중심적 요소로서 평면의 가동 칸막이와 다양한 높이의 천정으로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등 인간적인 스케일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높이의 내부 공간감은 건물외관에서 볼륨감의 변화가 솔직하게 표현 하였으며, 수평선을 강조하여 대지에 펼쳐지는 듯한 공간을 전개하여 자연과의 융합을 시도하며 매개공간의 효과와 평면형식은 세로와 가로로 직교하는 축선에 의해서 십자형플랜을 이루어 교차되는 두개의 축에 의해 결정되었다. 벽으로 구획된 각각의 방도 창문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자유롭게 유통되며, 칸막이 역할의 벽은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된다. 실내공간은 어느 방으로도 확산되어 공간의 연속성이 확연하며 창문은 프로벨 가베의 영향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형성하고 크게 열린 개구부를 통하여 테라스나 발코니가 정원 등 외부공간과 융합해서 각 실의 연속성과 아울러 내부와 외부공간이 상호 관입한 유기적 건축의 실체가 되도록 하였다.

* 유기적 건축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도시보다는 교외지역에 대한 선호로 표출되었다. 1889년 오크 파크에 있는 상류층을 위한 일종의 초록빛 오아시스에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첫 의뢰 작품을 통해, <소수의 행복>을 위한 새롭고 개인주의적인 민주주의의 바탕으로서 단 세대 주택들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보자르 스타일(밀와우키 도서관 디자인, 1893)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번민을 겪은 후, 그는 반 고전적, 반 유럽적 접근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의 문화적 독립성을 암시하는 사인인 <유기적> 관념을 따랐다.

1894년 공공 연설에서 처음으로 <유기적(organic)>이라는 말을 썼다.

당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록 하게 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그는 <유기적 건축>이라는 것을 <시간>과 <장소>와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 세 가지 원리가 그의 일생 동안 그의 건축물 을 지배했다.

우선 시간. 20세기 건물은 17세기 건물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건물은 현대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과거만의 삶의 방식과 사회 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료에 담겨 있는 나름대로의 본성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장소. 장소에 적합하려면 그것은 주위 환경, 경관을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 그 예로 prairie house. 지평선을 따라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주거 층은 위로 올려서 주변 환경의 경치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낙수장. 그것은 건물과 장소가 조화롭게 엉켜 있는 궁극적인 예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건물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에서도 인간을 단위 길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건물의 reality는 벽이나 천장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의 초기 집에서, 건축적 공간을 자유화시켰다. 불필요한 파티션은 없앴다. 즉 family house에 open plan을 제공하였다.

* 평가

모든 위대한 건축가는 분명히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분명 그의 시대와 그의 삶, 그리고 그 의 나이에 대한 뛰어난 해석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시대적 흐름의 격동과 역경 속에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적 사고의 근본인 유기적 건축론을 실재화하면서 이론과 실체를 겸비하며 충실하게 표현한 건축가로서, 자연을 디자인의 모든 원리, 결과의 내부적인 요소로서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건축이념은 생명 그 자체로서 내부적 유기체이며 형태와 기능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과도 융합해야 되며 공간은 그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으로서, 외부로 향하고 또한 내부로 향해 흐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제3차원으로 하여 느끼고 보며 사용하는 것으로 확립하였던 것이다.

라이트는 자연의 섭리를 터득해 그로부터 유추된 형태들을 토대로 건축을 조형했다. 따라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을 창조하고 자연과 건축의 통일 원리로 이뤄진 유기적인 건축을 보여줬다. 숙명여대 건축디자인학과 서수경 교수는 <그는 건축을 자연과 조화로울 수 있게 의도했고, 나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디자인했으며, 내부와 외부의 재료와 공법을 동일하게 처리함으로써 내·외부의 차이를 극소화 시켰다>고 설명한다.

또한 라이트는 미국의 대평원에 집을 지으면서, 지금은 광활한 대지 위에 짓는 집을 일컫은 건축 용어로 굳어진 <프레리 하우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인 <윈슬로우 저택>, <로미오와 줄리엣 타워>등이 프레리 하우스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이는 수평선을 강조해 입면을 단순화하고 자연의 무늬를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창을 가진 프레리 하우스를 만들었다. 미국의 속된 기계문명을 반대한 그는 광활한 미국의 대지와 밀착한 자연과 융합된 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Adolph Gropius 1883∼1969)

바우하우스의 창시자(1919)로서 20년대 이후 새로운 조형 및 건축교육의 중심지로 데소 바우하우스를 육성하여 새로운 조형 활동을 건축 혹은 건축공간을 통하여 근대공업과 근대생활에 연결하고자 하였다. 기능충족 , 합리적 생산방식에 근거한 건축의 이상을 주택에 발정시켜 주택의 모든 부재를 규격화하고 표준화하여 공장 생산하려고 주택공업을 제창하였다.

그의 저서 국제건축에서

<건축은 항상 민족적이며 또 개인적이다. 그러나 세 개의 동심원 ― 개인과 민족과 인류 ― 가운데서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원이 다른 두개의 원을 내포한다.>

라고 말하여 건축은 필연적으로 재료 , 구조기술 , 기능의 조건이 공통된 근대사회의 국제적으로 공통된 표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883년 베를린에서 출생하여 1969년 메사추세스주 보스턴에서 작고.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스승이자 건축가인 그는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뮌헨과 베를린의 기술 전문학교에서 건축에 관한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피터 베에렌스의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사무소에서 활동하던 많은 젊은 건축가들의 대부분이 명성을 떨친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이 중에는 미스와 르 꼬르뷔지에도 포함된다.

베에렌스의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은 지 3년 후인 1910년, 산업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서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디자인한 분야는 실내 장식과 벽지, 대량 생산을 위한 가구모델, 차체, 디젤 기관차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첫 번째 그의 중요 건물은 라인 강 근처의 알페트에 위치한 파구스 공장인데 1911년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디자인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철과 유리로 된 구조물로 한 단계 앞으로 돌출된 형태이며, 3층으로 된 이 건물은 바닥이 철골구조로 지지되어 있으며 벽은 유리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구조적인 특징은 모서리 부분의 수직 지지물의 부재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1914년 쾰른에서 개최되었던 독일 공작연맹 전시회에 그로피우스와 마이어가 함께 디자인하여 선보인 관리 사무소 건물은 근대 건축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건물이다. 계단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 탑은 수많은 근대 건축들 특히 백화점이 중요 형상이 되는 건축적 모티프를 제공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티프는 멘델스존에 의해 더욱 세련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1914-18년은 독일 군대에서 군복무를 하였던 시기로 그로피우스의 공백 기간에 해당된다.

1915년 삭스-바이마르의 대공으로부터 바이마르 소재의 <작센 대공 공예학교>와 <작센 대공건축 전문학교>의 교장이었던 앙리 반데 벨데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그는 이 학교를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란 이름에 통합시켰다. 이는 디자인과 수공예의 통합과 기예와 기술의 통합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19-1925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와 1925-28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관료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난 건축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며,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재직시, 1926년에 완성을 보게 되는 데사우의 학교 건물을 직접 디자인하였다. 강의실용 건물과 작업용 건물, 학생 거주용 건물이 함께 모여 있는 하나의 복합 건물과 공동 편의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과 이 두 건물을 연결시켜주는 다리 모양의 건물은 관리실과 클럽실, 그로피우스 자신의 개인 아틀리에로 이루어져 있다. 작업실이 있는 건물의 날개 부분은 보강 콘크리트 바닥-슬래브로 되어 있으며 버섯 모양의 기둥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지지대들이 유리로 된 외벽의 안쪽으로 물러나 있어, 전체가 하나의 유리벽을 형성하여 1층에서 3층까지 죽 연결된 파사드를 만들어 주고 있으며, 이는 아마도 산업 건물에 유리벽을 사용한 첫 경우였을 것이다. 이후 유럽과 미주 대륙으로 이와 유사한 공법들이 널리 퍼져 나갔다.

마이어의 협조 아래 디자인된 제나에 위치한 시립 극장의 개축안(1923) 과 에를란겐 소재의 국제 철학 연구학회 건물(1924), 베를린 극장의 프로듀서인 E.피스카토르의 협조 아래 1927년에 디자인된 종합극장 등이 1920년대의 극장 건물을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반원형의 오케스트라 극장을 갖춘 그리이스식 극장에서 원형 경기장(arena)을 갖춘 곡마장, 근대적인 프로시니움식 아치 유형에 이르기까지 행해질 극의 유형에 적용될 수 있는 극장을 디자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좌석의 열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른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부분별로 회전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러한 모델이 1930년 파리 전시회에 전시되기는 했지만 실제 지어지지는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이자 산업 디자이너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그 결과를 근간으로 짓고자 한 사회학자이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 교장 직을 맡고 있던 후기에 그는 도시의 성격을 보존하면서 가장 좋은 생활 조건을 얻기 위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였으며, 그는 도시거주자들에게 같은 밀도를 가지고 비교할 때, 가능한 한 더 많은 일조와 많은 잔디와 나무들로 이루어진 개방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환경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약 10충 높이에 해당하는 커다란 슬래브형 아파트 단지를 햇빛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지 위에 조성하였다. 단지 사이는 정원을 넓게 만들고 단지 양 끝은 개방 공간으로 구성하여 통풍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하였다. 전체적인 밀도가 위와 같은 조건하에서 좀 더 건물의 높이를 들어 올려 지면의 이용 공간을 더 많이 확보하게 하였고, 자연관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계획안도 내놓았다.

1933년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쥐게 되어 자유롭고 근대적인 성향의 건축가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런 이유로 1934년 그로피우스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서, 캠브리지주의 임핑톤 대학(1936)을 디자인했으며 이것은 영국 건축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초 하버드 대학교로보터 교수로 와 줄 것을 제의받고 미국으로 떠났으며, 다음 해 하버드 대학교 건축과장이 되었으며 일년 후 메사추세스 주의 린콜론에 자신의 집을 짓고 이 집은 1926년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재직 중 그가 디자인한 것으로 고전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후 미국의 여러 건축가들과 함께 주거 건축 분야에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해에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자 교사였던 마르셀 브로이어와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두 사람이 함께 내 놓은 작품은 브로이어의 집을 포함한 몇몇 주택들과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 출품되었던 펜실베니아관, 한 알루미늄 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한 피츠버그 근교, 뉴켄싱턴 소재의 주거 단지 계획안(1941) 등이었다. 이 주거단지 내의 건물들을 언덕의 지형선을 따라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에 이르는 길은 구불구불하게 나 있다. 1941년 브로이어의 죽음에 따라 그와의 파트너 관계는 여기서 끝을 맺게 되었다.

1932년 독일에 있을 때 이미 실험하기 시작한 대량 생산 주거를 위한 표준화된 건설 요소들을 1943-5년 다시 이곳에서 실험하였다. 앞서의 실험은 동판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후의 실험은 일정한 모듈을 바탕으로 한 가로세로의 크기가 모두 40inch 인 나무널을 이용한 것이었다. 콘라드 왁스만의 협조 아래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실험적 주택을 지었으며, 몇 번의 실험을 통한 경험 축적 후 상당수의 주택을 캘리포니아에 남겼다.

1945년 <건축가 협력체>라는 이름하에 8명이 팀을 이룬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과 파트너 관계를 맺었으며, 여기서 그는 안내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커다란 그룹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가 협력 작업의 가치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러한 협력 작업이 근대 건물을 디자인하는 데는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느껴 왔던 것이었다. 이 팀의 작품으로 케임브리지 소재 하버드 대학교의 대학원 센터를 들 수 있는데, 이 건물은 7개의 기숙사 블록이 한 그룹을 형성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그룹들은 사교 센터를 중심으로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1957-1967년 사이의 그의 마지막 활동기는 서부 베를린에서 보내게 된다. 1957년 한 지구에 있었던 국제 건축 전시회를 위한 일환으로서 10층짜리 멋진 아파트를 선보였으며, 이 건물의 남쪽을 바라보는 파사드는 요철형태의 발코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층은 개방되어 있고 자유롭게 서 있는 각주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late modern의 특징을 많이 느끼게 해주고 있다.

1960년대에 브리츠-북코브-루도란 이름의 뉴타운이 그로피우스의 도시계획에 의해 전적으로 지어졌다. 원래 다름슈타트에 지으려고 계획한 것인데, A. 크비아노빅에 의해 새로운 대지로 옮겨지어졌다. 그로피우스의 건물들이 근대적인 재료들(철, 콘크리트 , 유리)을 잘 이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보다 더 훌륭한 점은 건물의 외벽 전체를 유리 막으로 이용하여 일광을 최대한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건축적으로 볼 때, 그의 작품은 항상 고전적인 잔류물과 비례의 탁월한 이용 등이 그 특징으로 지적되며, 이러한 예로 가장 적합한 것으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 있는 직원을 위한 주택을 들 수 있다. 그는 건축가로서는 물론 스승으로서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표준화와 조립식의 정교한 적용문제에 대한 위대한 신봉자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의 건물이 전체적인 디자인에 대한 구성원 자신들이 역할을 완전히 이해한 후 작업을 해 나가는 협조 작업의 산물이 되기를 원했다. 그로피우스는 이와 같은 과정을 공동 사회 생활의 상징이자 사회의 지적 통합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 개인주의가 아닌 협력 관계의 건축

현대건축의 건축가들의 경향이 대부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 활동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그로피우스는 협동 작업을 주장하여 이를 사무실의 지침으로 하여 소장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건축교육에 지대한 관심과 정력 을 모아 현대 건축교육의 바탕이 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였다.

그의 이념은 <건축은 광범위한 종합예술>이라고 믿어 건축가들의 협동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회화, 조형물 등)를 개입시키고, 또한 작품의 실현을 위하여 수공 법에서 다량 생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입하여 실습을 시작하였고, 설계에서는 건설업자를 참여시켜 건설 과정을 학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육이념은 건축, 미술, 공예분야 등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고 거기에 따르는 이론과 실기를 연구하는 건축교육을 구상했다.

그래서 구라파 전 지역에서 각 분야의 유능한 전술한 강사진을 초빙하여 이론과 실기 교과과정을 개설하였다. 이론의 기초 과목 중에 평면, 입체, 조각, 공간, 색, 조형, 도학, 제도 등을 연구하였다.

실기 수업으로 예비과목으로 자연, 역학, 재료공학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세분화하여 돌, 나무, 점토, 유리, 철직물 등에 관한 연구, 분석을 통 하여 재질의 특성을 이해하였다. 바우하우스의 기초, 예비과정은 원리와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창작의 준비로서 학생들은 글자를 쓰기 전에 선을 배웠고, 조각을 하기 전에 형태를 이해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기초과정을 수료한 후에 작품과 실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모형을 만들면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1/100,1/200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를 시작해서 건축과 그 관련(미술,조각,철공,목공,가구,도자기,사진,그래픽디자인,편물,공업디자인,인테리어 디자인, 단지 계획 등)의 포괄적인 교육을 한 것은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특히 미국에 현대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조립 주택의 창시자

벌들은 과학기술을 능가하는 집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똑 같은 모양의 집 밖에는 지을 줄 모른다. 인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각기 다른 공법으로 집을 짓는다. 그래서 건축은 시대정신의 조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의과대학 연구실의 인체 골격 표본을 보고 철근 빌딩을 생각해 낸 것은 19세기의 윌리엄이었지만 라인 생산의 포드 공장을 보고 조립식 주택을 만든 것은 20세기의 그로피우스였다.

드디어 인간이 사는 집도 규격화한 부품으로 뜯어 맞춘 다량 생산품의 하나가 된 것이다. 독일 건축가 발트 그로피우스는 1909년 미국 포드 공장의 어셈블리 라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혁명이다. 20세기 노동과 소비문화는 송두리 채 바뀌고 있다. 포드의 라인 생산 시스템을 주택 건축에 도입할 수는 없을까?>.

그는 당시 명망 있는 건축가 페터 베렌스와 2년간 이 문제를 토론했다. 베렌스는 그로피우스에게 <당신이 '하우징계의 포드'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자동차와 달리 주택 부품은 규격화 - 표준화나 사전 제작에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그로피우스는 포드 시스템의 주택 응용문제를 10년 이상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모르타르와 같은 신축성이 적은 건식 재료를 찾아내고, 프레스로 찍어내는 기계 부품과 똑같이 조립용 주택 부품을 규격화하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1923년 조립식 실험 주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현대 디자인의 산실로 불리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3년 뒤인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독일 바사우 교외에 대형 조립 주택타운을 건설했다. 사람들은 마치 <장난감 집짓기> 같이 제작되는 주택의 대량 생산에 입을 벌렸다.

<프레하브>공법-그로피우스가 개발한 이 공법은 주택 건설의 시간 단축, 계량화를 가능하게 해, 아파트 대형 빌딩 등 우리가 요즘 보고 있는 현대 빌딩의 대량 생산을 촉진시켰다. 건축사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프레하브>란 <텔레비>와 같은 일본식 영어 표기로 정식 명칭은 <프리 퍼블리케이션(PRE-PUBLICATION)> 미리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그로피우스는 기계적 생산이 디자인 대중화의 선결 조건이 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창안한 사치품보다는 대중들을 위한 훌륭한 디자인이 더 중요하다는 그로피우스의 정신은 바우하우스 디자인학파 미술 공예 운동의 목표로 확산됐다. 그로피우스는 1937년 미국 하버드대 건축학부 학과장으로 초빙되어 프레하브 공법을 통한 조립 주택의 대중화 보급에도 힘썼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아파트 창문이나 문짝들은 규격화된 지 오래다. 조립 주택용 부품을 만드는 전문 회사도 성업 중이다. 서울 서소문 삼성 본관 건물처럼 미리 제작된 콘크리트 구조물이 조립돼 만들어진 대형 빌딩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일본 동경의 조립 주택 전시장에서는 <싼 값에 최고의 주택 디자인을 가진 조립 주택을 판매 한다>는 세일즈맨의 목소리가 높다. 지금부터 76년 전 독일의 한 건축가가 가진 꿈이 세기말 전 세계에 가장 보편화된 건축 방식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 바우하우스 ( Bauhaus )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구상하여 바이마르에 설치한 조형(造形)학교. 이전에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하였다.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고자 하는 이념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특히 새로운 출발이었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는 교육내용이 다분히 개인적인 발상에 따라 지도되었다. 그로피우스가 교사로 초청한 이텐, 파이닝거, 클레, 슐렌머, 칸딘스키 등이 대부분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는데, 예비과정을 맡은 이텐은 신비적인 편견조차 가지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최종목표인 건축 수준의 교육은 실시되지 않았으며 초기에는 공예학교적 성격이 엿보였다.

1923년에 이르러서야 그로피우스의 이념이 명쾌한 형태를 잡기 시작하였고 그 해에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일>이라는 테마로 바우하우스의 연구 성과를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로피우스와 이텐 사이에 대립이 생겨 이텐이 바우하우스를 떠났으며, 이텐의 후임으로 모호리 나지가 바우하우스에 참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육방침이 대체로 정착되었다. 그 뒤 약간의 변경이 있긴 하였으나 23년에 정해진 교육과정은 원칙적으로 계승되어 바우하우스의 큰 특색이 되었다. 이 교육과정에 의하면 학생은 우선 예비과정에서 반년 간 기초적 조형훈련을 받고, 토목·목석조각·금속·도자기·벽화·글라스 그림· 직물·인쇄의 각 공방(工房)으로 진급해서 형태교사로부터 조형의 이념을 배우는 동시에 공작교사로부터 실제적인 기술을 배워 익히는 체제이다. 다음의 데사우기(期)에 들어서서는 이미 종합적인 시야를 가진 인재가 육성되었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25년 바우하우스는 경제적 불황과 우경파(右傾派)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위기에 이르렀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데사우시에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였다. 바이마르기(期)의 졸업생 알베르스, 바이어, 브로이어 등이 교수진에 참가하자 각 공방도 비약적으로 충실해졌다. 바이마르기와 크게 다른 점은 제품의 공업화였다.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을 추구하였으며, 공방의 작업을 산업계와 실제로 제휴하게 되었다. 데사우기(期)의 바우하우스를 상징적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校舍)(1926)가 있다. 이 교사는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로 통일되어 있다. 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叢書)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 기여하였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의 데 스틸파와 말레버치의 저작도 포함되어 있어 바우하우스가 가지고 있던 국제적 유대를 알 수 있다. 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나고 한네스 마이어가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세번째로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 안에 있던 형식주의적인 일면을 공격하고, 민중에의 봉사야말로 디자인이 할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건축이 모든 의미로 미적 과정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19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의 충돌로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미스 반 델 로에가 교장이 되었으며, 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데사우를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이것도 33년 나치스에 의하여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망명 교사나 졸업생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특히 미국에서의 바우하우스 시스템 전개는 현저하여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의 하버드대학 건축학부, 모호리 나지에 의한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인스티튜트 오브 디자인을 거쳐 일리노이공과대학 디자인 학부에 합병) 등은 미국 디자인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졸업생 막스빌에 의하여 55년 울름조형대학이 설립되었다. 68년 슈투트가르트전(展)을 출발점으로 <바우하우스 50년 기념전>이 세계 각지를 순회하여 그 디자인 사상을 새로이 조명(照明)받았다.

바우하우스는 근대 기술의 대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론적 교육과 실제적 교육을 행하여, 예술과 기계 기술, 인간과 기술, 예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과 생활 형식의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종래 예술의 개인주의적, 살롱적 경향을 부정했던 바우 하우스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다. 따라서 그 기반이 되는 현대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분석하고 인식하여, 그것을 형태의 창조력의 해방, 자연의 재질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익히는 예비 교육과, 또 전문 코스에서의 형태 교육과 공방실습 등에서 구체화되었고, 그 교육의 방법론은 현대 디자인 교육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로피우스가 제기한 <산업과 예술의 결합>은 하네스 마이어의 시대가 되면 한층 더 기능주의적 방향으로 전개되어 디자인의 사회성이 강조된다. 그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바우하우스의 조형 감각을 경고하면서, 바우하우스는 예술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며, 따라서 디자이너의 창조적 활동은 사회에 의해 설정되어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 사회에 대해 객관적 지식을 갖고 그 생성에 걸려 있는 문제를 취급할 때 디자이너는 비로소 자신의 작업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이런 사상은 보다 복잡한 모습을 지니면서 각국의 근대 조형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Mies van der Rohe

Ludwig Mies van der Rohe

본명은 Ludwig Mies (1886. 3. 27 독일 아헨~1969. 8. 17 미국 시카고), 독일 태생 미국의 건축가.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그의 직선적 건축양식은 1920년대 말에 등장한 국제주의 양식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사에 혁명적 공헌을 했던 미스의 중요한 초기 작품들 가운데 프리드리히가(街) 사무용 건물(1919)과 유리 마천루(Glass Skyscraper:1921)는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그 도면이 남아 있다. 후기 작품으로는 필립 존슨과 함께 설계한 뉴욕 시의 시그램 빌딩(1958)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베를린의 20세기 미술관(1968 준공)이 있다.

*초기 교육과 영향

루트비히 미스(그는 건축가로 기반을 잡았을 때,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를 이름 뒤에 덧붙였음)는 유럽에서 가장 큰 역사적 도시의 하나이며 한때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 중심지였던 독일의 아헨(또는 엑스라샤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으로 작은 가게를 갖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다양한 건조물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재료의 성질에 대한 감각과, 건축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숙련된 기능을 갖게 되었다. 미스는 정식 건축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는데, 그는 이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듯하다. 15세 때 아헨의 여러 건축가들의 견습공이 되어, 벽에 꽂아놓은 커다란 갈색 종이에 르네상스 장식을 목탄으로 스케치하는 일을 맡았는데, 석고제작자들은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석회 장식 벽을 만들었다. 미스는 이것을 힘들어했지만 덕분에 드로잉 솜씨가 늘었고, 이 솜씨는 결국 그 당시의 가장 훌륭한 건축도면들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19세가 된 미스는 베를린의 한 건축가 밑에서 일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는데, 이 건축가는 목조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목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을 느낀 미스는 곧 그 일자리를 그만두고 당시 아르 누보 양식으로 작업하던 가구 디자이너인 브루노 파울의 견습공이 되었다. 2년 뒤에 미스는 첫 번째 주문을 받았다. 전통적인 교외 주택을 설계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건축가였던 페터 베렌스는 그의 완벽한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고, 21세의 미스를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게 했다. 그 무렵 발터 그로피우스와 르 코르뷔지에도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막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베렌스는 독일공작연맹의 주요회원이었기 때문에, 미스는 그를 통하여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옹호하던 예술가와 장인들의 단체인 이 연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독일공작연맹은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에 의한 영국 미술공예 운동에 자극을 받아 창설되었다. 그러나 모리스가 산업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거부감에서 중세의 장인정신을 되살리려고 애쓴 반면, 독일공작연맹은 역시 똑같이 낭만적인 열정으로 우상을 숭배하듯 과학기술을 환영했다. 필요한 것은 기계로 만든 물건(또는 건물)에 형태와 의미를 주는 것뿐이라고 독일공작연맹의 대변인은 선언했다. 산업시대에 걸맞게 새롭고 <기능적인>이 구상은 결국 <총체적 문화(Gesamtkultur)>, 즉 완전히 개혁된 인위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범세계적 문화를 낳게 되었다. 끊임없이 그리고 종종 이상화되어 논의된 이 개념은 계획이라기보다는 이상이자 신념이었다. 이 신념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건축의 <근대화> 운동을 이끌었다. 건축사가 헨리 러셀 히치콕과 건축가 필립 C. 존슨은 1932년에 출판한 <국제주의 양식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건축양식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이름 지었다.

베렌스는 감각적인 물결 모양의 아르 누보가 독일공작연맹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고 아르 누보 대신 19세기 초의 독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순수하고 대담하며 단순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강철과 유리로 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베를린 모터 공장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독일 대사관(1911)을 비롯한 베렌스의 많은 작품들이 미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총체적 문화>의 건축을 추구하는 미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사람은 베렌스가 아니라 싱켈이었다. 미스는 평생 동안 싱켈의 건축이 갖고 있는 우아한 명쾌함이야말로 인간이 새로 이룩해야 할 환경의 형태를 가장 완벽하게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은 네덜란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헨드리크 페트루스 베를라헤였다. 베를라헤는 유럽 전위 예술가들을 그토록 감동시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미국 주택을 실제로 목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베렌스는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인 H. E. L. J. 크뢸러 부인의 대저택을 짓기 전에 나무와 범포로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모형 주택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미스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냈고, 미스는 그곳에서 베를라헤를 알게 되었다. 미스는 거기에서 1년을 머물렀는데, 그것은 크뢸러가 베렌스의 설계에 만족하지 못하여 미스 자신의 설계를 새로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베렌스의 것보다 우아한 미스의 설계도 역시 건설되지 않았지만, 미스는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동안 베를라헤의 작품과 철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베를라헤의 작품은 미스에게 벽돌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켰고, 네덜란드 거장의 철학은 미스에게 <건축의 본질>과 <구조적 정직성>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었다. 나중에 미스는 시카고에서 건축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건축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건축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바란다.>고 말하곤 했다. 미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구조의 정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눈에 띄게 드러나거나 극적으로 과장된 기둥이 아니라 실제로 건물을 떠받치는 구조물을 자기 건물의 중요한 특징으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

독일 제국에서는 대학 졸업자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스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포장하는 일을 했다. 그가 1918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근대화 운동에 저항한 독일 제국은 패전으로 무너져 있었고, 나라는 온통 굶주림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혁명의 혼란 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희망은 모든 예술가와 지식인을 사로잡아 새로운 창조력의 거대한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바우하우스(바이마르에 갓 설립된 조형예술학교)의 선언문에 따르면 건축·그림·조각은 새로운 표현양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국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림과 조각이 건축에 그토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은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건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허무주의적이고 성상 파괴적이며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시각예술 및 문학운동이었던 스위스 취리히의 다다이즘, 직4각형과 원색의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기하학적 추상운동인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그리고 러시아의 그림과 조각 분야에서 일어난 비구상적 추상 운동인 구성주의와 절대주의 등이 있다. 미스는 이 같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별로 사교적은 아니었지만, 11월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그룹은 1918년 11월에 일어난 독일혁명을 기념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그는 근대 건축의 개념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애쓰는 체너 그룹에 가입했으며, <G>(독일어로 <조형>이라는 뜻의 <Gestaltung>의 머리글자)라는 잡지의 창간에 참여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많은 이론적 계획안을 이 잡지에 발표했으며,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실제로 짓기 위해 설계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이 시기에 그가 설계한 중요한 건조물인, 살해당한 공산주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정된 표현주의적 기념물(1926)은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시기에 미스가 설계한 주요작품들은 건물로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련의 도면과 스케치에 묘사된 이론적 설계안들은 그의 후기 작품의 전체적 범주를 미리 잘 보여준다. <프리드리히가 사무용 건물>은 유리로만 이루어진 건물을 짓기 위한 최초의 계획안이며, 미스는 이를 통해 <뼈대와 외피뿐인 건축>의 원칙을 확립했다. <유리 마천루>는 이 개념을 곡선 형태에 적용하여, 건물 정면이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설계도들은 둘 다 극단적인 단순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밖의 이론적 설계안들은 콘크리트와 벽돌 건축의 가능성과, <디 스티에>의 형식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개념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채 도면에만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 그만큼 착상이 다양하고 건축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은 거의 없다.

이 영향은 1927년 독일공작연맹이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바이센호프에서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미스는 그 무렵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이 되어 있었는데, 이 전시회는 미스가 설계한 시범주택단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비롯한 유럽의 주도적인 근대주의자 16명이 이 시범주택단지를 위해 총 33채의 다양한 주택과 아파트 건물을 설계했다. 무엇보다 바이센호프 전시회는, 전쟁 직후에 생겨난 다양한 건축학적 조류가 이제는 하나의 운동으로 통합되어 국제주의 양식으로 탄생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양식이었고, 그 영향으로 유럽의 상류층은 갑자기 현대적 저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미스가 체크의 브르노에 지은 투겐트하트 저택(1930)도 그중 하나였다. 저택을 지을 여유가 없는 지식인들은 미스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 디자이너인 마르트 슈탐이 전시한 새로운 철제가구와 실내장식품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독일공작연맹의 사회적 목적을 촉진하는 데에는 거의 이바지하지 못했다. 값싼 조립식 주택과 공장에서 생산하도록 설계된 작품 가운데, 실제로 조립되거나 대량생산된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설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식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부족한 데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산업은 <양에서 질로, 양적 팽창에서 질적 내실 쪽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하면 <산업과 과학기술이 사상 및 문화의 힘과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과학기술과 문화는 <독일 전시관>(<바르셀로나 전시관>이라고도 함)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전시관은 사실상 품질과 사상 및 문화의 건축학적 진술이라고 묘사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이 전시관은 독일 정부가 1929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를 위해 주문한 것이다. 여기에는 가로 53. 6m, 세로 17m인 트래버틴(온천 침전물로 만든 건축 재료) 바닥 위에 크롬으로 도금된 강철 기둥을 세워, 일부는 얇은 지붕을 덮고 일부는 지붕이 없이 노출시킨 연속적인 멋진 공간을 이루는 전시관 자체만이 전시되었다. 공간은 벌꿀 빛깔의 마노와 초록빛 티니아 대리석 및 서리무늬의 판유리로 이루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는 게오르크 콜베가 조각한 누드 상을 놓은 풀장 하나와 미스가 이 전시관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유명한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며, 게다가 평범한 예술이 아닌 사치스러운 예술이었다.

1930년 미스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우하우스는 원래 바이마르에 있었지만, 1925년에 그로피우스가 데사우로 옮겨왔다. 밖에서는 나치가 공격해오고 안에서는 좌익계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학교는 언제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스는 행정가의 재능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엄격하면서도 훌륭한 스승으로, 곧 학생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 온 한 학생은 집에 보내는 편지에, <미스는 우리를 훌륭한 건축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훌륭한 건축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것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나치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학교들을 폐쇄하자, 미스는 베를린의 비어 있는 전화 공장에서 개인적으로라도 학교를 계속 운영하려고 몇 달 동안 애썼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체주의적 국가에서의 근대적 디자인은 정치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설 자리가 없었다. 미스는 나치가 학교를 폐쇄하기 전에 스스로 바우하우스의 종말을 선언했다.

*미국에서의 활동

그 후 4년간 많은 설계도를 그렸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37년에 미스는 미국으로 갔다. 바우하우스에서 미스를 만나 열렬한 옹호자가 된 필립 존슨의 주선으로, 그는 와이오밍 주에 교외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설계도 역시 도면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건축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 시카고 아머 학교(나중에 일리노이공과대학이 됨) 건축학부를 이끌 사람을 찾고 있던 건축가 존 홀러버드를 만났다. 미스는 건축학부를 맡는 조건으로 <완전한 재량권과 연봉 1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는 재량권은 얻었지만, 연봉은 요구한 것보다 적게 받았다. 1958년 그가 은퇴할 무렵, 이 학교는 미스가 직접 설계한 캠퍼스뿐 아니라 잘 통제된 교육방법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의 다양한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건물의 특징은 입체적 단순함이었다. 드러나 있는 철재 골조물, 교정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황갈색 벽돌 등이 이 건물에 사용된 기본 재료였다.

미스가 정년퇴직한 해에, 필립 존슨과 공동으로 설계한 뉴욕 파크가의 시그램 빌딩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유리와 청동 및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초고층 사무용 건물이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이 건물로 인해 절정에 이르렀고, 미스는 국제주의 양식을 선도하는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재료와 과학 기술의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것은 옛날 독일의 <총체적 문화>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과 8년 전만 해도 〈하우스 뷰티풀 House Beautiful〉이라는 잡지는 미스가 미국에 온 직후에 지은 건물들(특히 일리노이 주 플레이노에 에디스 판스워스를 위해 지은 집)을 미국 생활방식에 대한 사악한 위협이라고 비난하여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당혹감을 대변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주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빈정대기까지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Time]지와 [ Life]지 및 [포춘 Fortune]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는 이제 <20세기 건축 혁명이 완수되었고, 그 혁명은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 미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구상한 설계도를 대부분 실현한 유리상자형 건물이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잇따라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과 취향의 흐름은 곧 방향을 바꾸었다. 강철 골조와 유리벽은 더 이상 건축학적 독창성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종말처럼 여겨졌다. 젊은 세대의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앞날이 촉망되는 에로 사리넨은 <우리는 우리 건축의 지평을 탐구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겸손하게 손을 잡고,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배척한다.> 미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필립 존슨마저도 오로지 단순함만을 추구하는 스승을 떠나 좀 더 낭만적인 역사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후기 활동

미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1920년대에 전개한 신념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 신념에 따른 아름다운 건물들을 창조하느라 평생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작품으로는 시카고 아파트 건물(1949, 1951), 디트로이트의 주택단지인 라페이에트 파크(1956~63), 볼티모어의 사무용 건물인 원 찰스 센터(1963), 휴스턴의 박물관(1958), 시카고의 페더럴 센터(1964), 워싱턴 D. C. 의 공립도서관(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건물 가운데 미스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서베를린에서 1968년에 준공된 20세기 미술관(나중에 신 국립미술관으로 개명)이었다.

큰 몸집으로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된 미스는, 그의 전기를 쓴 피터 블레이크가 표현했듯이, 그 자신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강암 조상처럼 보이게 되었다. 1930년에 이혼한 그는 시카고의 미시간 호 근처에 있는 낡고 널찍한 아파트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그의 사무실은 집 근처의 낡은 창고 건물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아꼈고, 값비싼 여송연을 피웠으며, 우아한 옷을 입었고,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그가 친절하고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으며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즐겨 회상하곤 한다.

*Mies van der Rohe가 걸어온 길

Mies는 르 꼬르뷔제, 라이트와 함께 근대 건축의 거장의 한사람이며 건축 기술의 공업화와 새로운 건축재료, 시공 방법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며 콘크리트, 유리, 철을 사용해서 여러 실험적 작업을 수행했다. Mies의 이러한 순수한 형태에 대한 열정적 집착과 재료 사용에 대한 신중한 배려는 아마도 어렸을 때의 경험(어려서부터 부친 의 공방에서 벽돌과 돌을 정확히 쌓아올리는 기술을 습득)에서 연유한 것인지 모른다.

라이트는 기계를 건물을 생산하는데 자연현상에 가깝도록 꾸밀 수 있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마천루는 수목같이, 주택은 동굴같이, 박물관은 조개껍질같이 만들기 위한 도구, 즉 그의 유기적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알았고, 르 꼬르뷔제는 기술이나 예술이 모두 기하학적 형태에서 유도되는 것으로 알아 기술과 예술 사이에 모순적 요소가 없이 해결하였다. Mies는 예술은 과학과 같이 합리적면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Mies의 생각은 라이트나 르 꼬르뷔제와는 달리 누구와도 전달 교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한 Mies 건축의 형태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Mies는 MoMA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뉴욕의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여기에는 20세기 초에 그가 발표한 유리 마천루의 스케치가 전시되어 있다. 타우트를 연상시키는 흑색 콘테의 강렬한 터치로 유리의 반사와 투명함, 구조의 독립을 표현한 일련 의 고층 사무소 계획은 1919년에서 21년의 베를린 시대에 발표한 혁신적 제안이었다.

캔틸레버의 구조, 단순한 아름다움과 명쾌함, 현대 건축의 특징이 모두 여기에 집약되어 있어, 후일 그가 미국에 건너가 이루어 놓은 스카이 스크레이퍼의 원칙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만년에 미국에서의 정연한 상자형 고층 사무실과는 다르게 부정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다. MIes는 거의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디 스티에 운동의 추상성과 기하학적인 평면 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1910년 라이트 의 베를린 전시회로부터 <강렬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때 Mies는 <우리들 젊은 건축가들은 심한 정신적 혼란에 빠졌다. 이 거장의 작품은 어리둥절할 만큼 형태의 풍부함과 표현의 맑음을 지니고 있어 의외로 힘찬 건축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초기에 베렌스의 신 재료에 대한 세밀하고 용이 주도한 취급법과 베를린 전시회에서 라이트의 주택 평면 계획에서 얻은 바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1923년에 그가 발표한 <벽돌조 전원 주택>에서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자 모양의 주택, 혹은 구멍이 뚫린 상자의 연속으로서의 주택이라는 전통적 개념 을 완전히 불식하고 콤포지션으로서의 인식으로 이 주택은 근대 건축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시대의 디 스티에파 화가 되스 부르그의 그림인 <러시아 춤>의 리듬과의 유사성이 자주 지적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트의 초기 전원주택을 그 모델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여러 개의 방들이 모인 중앙의 코어, 상호의 칸막이들은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공간의 흐름을 강조하고, 전원으로 연장 되어 있는 긴 벽돌 벽에서 그러한 특징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계획한 콘크리트 조의 전원주택 안은 다층의 테라스 형태로 되어 있어 대지 주변에 마치 바람개비 같은 구성을 한 확산형 구조물이다. 주택의 수평성과 더불어 주요 계획 요소들에 맞추어 만들어진 불규칙적인 매스의 결정은 당시의 국제주의 양식을 지배하던 공간을 각주 로 밀집되게 둘러싸는 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벽돌조 전원주택안과 콘크리트 전원주택 안은 근대 건축 발전에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유럽의 건 축 공간에 대한 전통적인 의식 중 주택 공간에 던져진 혁명적 형태이었다.

혁명적 형태라는 것은 19세기 이래 역사적 양식의 모방과 절충을 되풀이하고, 쇠약하고 부패 한 건축 공간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음을 말하는 것이다. 벽돌은 구조 재료로 하는 건축은 예외 없이 연속 벽이 건축 주변을 둘러싸야 하고, 지붕과 바닥이 일체로 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가진 창으로 벽이 알맞게 분단되어 있다. 창은 유럽에서는 역사 이래 벽 속에 뚫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의 창은 기성 개념을 근대적 내용으로 쇄신 하려고 태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Mies는 이 계획안에서 자기의 건축 활동에 벽돌을 구조 재료로 사용하는 것으로 강한 제약을 가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건축 공간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한 주장을 표명하고 있다. Mies가 나중에 위대한 건축가의 한 사람으로 성공할 자격은 그가 전통적으로 만들어지는 덩어리로서의 건축 공간에 대해 정면에서 대결하여 거기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드디어 해체를 명령하여 쇠약해진 건축 내부 공간에 새로운 공간을 도입하므로 다시 생기를 준 이 조그만한 계획안에서 이미 얻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Mies는 이러한 대담한 구상을 아직 실현시킬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1923년 바로셀로나 박람회의 파빌리온에서 실현하였다. Mies는 여기에서 과거에 근대 건축의 탄생에 큰 자극을 준 박람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참신함을 주려고 하는 공통된 열의와 호기심에 도움을 받아, 벽돌집에서 아직 남아 있었던 덩어리로서의 건축 공간의 자태를 소멸시키고 벽, 지붕, 창 같은 건축 공간의 구성 요소에 전혀 새로운 성격과 기능을 부여하였다.

여기서 벽은 건축 공간을 가두어 두고 붕쇄 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공간을 필요에 따라 차단하고 적당한 액센트를 주기 위하여 작용할 뿐이다. 벽돌 전원주택과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사이에는 두 개의 건축 구조체의 상위로 근본적으로 양상을 달리 하게 된 것이다.

전자는 전통적인 제약이 많은 구조 재료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폭넓은 가능성을 가진 근대적 재료인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이 파빌리온에서는 평탄한 지붕 슬래브를 겨우 8개의 가는 크롬 합금의 강철주 위에 올려놓고 있어 전통적인 건축에서 밀접하게 연속되어 있는 지붕과 벽과 바닥만이 일체화할 이유를 상실하여 각각 새로운 기능과 형태를 부여받고 있다. 벽이 경쾌한 자태로 자유자재로 뻗어 있는 것은 벽이 이제는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으며, 단지 기능에 따라 구획하는 역할만 맡으면 그 뿐인 때문이다. Mies가 파빌리온의 벽 재료로 선명한 색채를 가진 대리석이나 줄 호박돌을 사 용하여 이러한 새로운 재료의 극적인 표현을 강조한 것은 벽의 새로운 의의를 살리기 위 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어 지고, 신 재료에 의한 근대적인 구조체가 유리의 사용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Mies가 창안한 공간의 성질은 평탄한 슬래브로서의 지면에서 수 미터 떨어진 위치에 몇 개의 철주 위에 고정된 철근 콘크리트 구형의 수평면으로 형성된 우주 공간의 일부인 건축 공간인 점에서 그의 천재적 창조력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벽돌조 주택 계획이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Mies가 생각해 온 건축 공간이 실제적으로 주택에 적용된 예로는 튜겐 하트(1930) 저택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저택에서 우리는 Mies가 근대적 주택 공간의 제안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1층의 개방적 내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튜겐 하트 저택의 1층 내부 공간은 가는 광택 있는 철주로 지지된 두 장의 수평면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Mies는 이 두 장의 슬래브 의 두 측면에 바닥에서 천정 면까지 연속된 넓은 유리면을 두어 유동하는 것 같은 공간의 상호관입을 최대한으로 달성하였다. 50×80 피이트의 거실은 평탄면과 곡면의 두 개 의 간벽에 의하여 거실, 식당, 서재, 현관, 홀의 네 개의 각각 다른 기능을 전체적인 공간의 통일을 분단함 없이 유기적으로 적절히 구획하고 있다.

Mies는 튜겐하트 주택을 마지막으로 그로피우스의 권유에 따라, 1930년 바우하우스 교장이었던 M.마이어의 뒤를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여서 하교가 폐교되고 Mies 는 미국으로 이주해 가서 1938년 시카고에 있는 I.I.T. 공대(당시의 이름은 아르모르 대학)로부터 초청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동 대학의 수많은 건물을 건설하였다. 24동의 건물 배치는 서로서로 직선적인 관계에 있어 한 눈으로는 전체를 내다볼 수 없지만, 전체를 포괄하는 공간, - 즉 시간(TIME)이라는 차원을 포함하므로 다시 말하면 움직이므로 처음으로 지각될 수 있는 공간 -을 창조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Mies는 24피이트의 모듈을 써서 그의 모든 비례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비례를 취급하는 면 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신중성은 재료를 취급하는 그의 성질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비례와 구조와 재료에 대한 세련된 수법은 I.I.T. 대학 건물에서 완성되었다. 그 후 그는 미국에서 레이크 쇼어 아파트(1951), 판스 워스 주택(1950),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안(1953), I.I.T. 대학의 크라운 홀(1962) 등을 내 놓게 된다.

그 중 판스 워스 주택은 후기의 Mies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두 가지의 수평면 을 사용하여 계획된 것이다. 보편적인 오픈 스페이스 사이에 두 개의 절대적인 평면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그 기능적인 왜곡이 선험적인 결정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 다. 왜냐하면, 판스워스 주택은 어지러운 주위 환경과 고립된 채 숲속에 자리 잡은 단지 주말휴가를 보내는 한 사람만을 위한 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다랗고 개방적인 유리벽의 사용과 자연의 풍부함과 대비된 세련된 기술의 상징으로서의 이상적인 해결책이 가능케 된 것이다. 두 개의 철재 평면에 칠해진 백색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적색·녹 색·갈색의 자연색과 대비되며, 이러한 대조는 단과 계단으로 인해 상이한 차원을 지닌 채 평면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사실 이 평면은 그 평면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I형 보 위에 구성되어 있다. Mies 건축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I형 보는 고유의 구조적인 의도보다는 시각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이 I형 보는 구조적인 지지체일 뿐 아니라 시각적인 분할 테이기도 하다. 즉 유리벽은 창문이나 벽 또는 칸막이로서도 사용 된다. 결정적인 의미의 모호함이나 다의성 속에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대답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요소에 복잡성이 내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Mies의 작품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이 신비는 다양한 경험에 적합한 일련의 결정 요인을 나열함에 의해서보다는 꽉 차인 전체로서 한 번에 인지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 스워스 주택의 기본 개념(일종의 개방된 파빌리온)은 I.I.T.공대에 있는 건축 및 디자인 학과를 위한 크라운 홀(1952-6)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떠 있는 듯한 계단들이 테라스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판스 워스 주택의 경우처럼 바닥 슬래브를 지면에서 몇 피이트 정도 들어 올린 것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하지만, 외양에도 불구하고 크라운 홀 의 바닥 슬래브는 지하층 밑에서부터 지지되어지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되어 있다.

판스 워스 주택의 바닥 슬래브 밑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면, 크라운 홀은 판유리로 끼워져 지하층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런 식의 공간의 개방성은 지지물 위에 매달려 있는 듯한 2개의 슬래브에 의해 더욱 고양되고 있다. 또 이러한 개방된 파빌리온 형식을 따른 작품으로는 1953년 시카고의 컨벤션 홀과 서 베를린의 뉴 내셔널 화랑(1962-8)이 있는 데, 컨벤션 홀은 지붕 슬래브는 한 변이 9.1M인 입체 모듈 위에 엮어진 트러스들로 구성 된 3차원 구조물로 되었다.

Mies는 5만여 명의 수용 인원이 가능한 기둥 없는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스팬이 219.5M에 이르는 슬래브를 만든 것이다. 3차원적인 천정 트러스의 외곽 부분으로부터 확장되어진 대각선 버팀대는 외벽을 2차원적인 트러스로 만들어 버렸다. 이 버팀대는 하부의 보강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직접 맞닿을 정도로, 건물의 전면을 가로 지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서 베를린의 뉴 내셔널 화랑은 십자형 단부 로 된 8개의 지지물 위에 정간 형태의 천정이 놓여져 있으며, 각 코너 부분의 지지물은 뒤로 후퇴되어 있는 형태이다. 깊숙이 뒤로 밀려난 유리벽은 몇 개의 움직일 수 있는 무대용 벽들에 의해서만 분할되어지는 전시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Mies의 작품과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외벽에 위한 명확한 윤곽(4각형, U자형 등)을 가진 상자형의 형태에서 복잡한 윤곽을 가진 직방체가 복합한 혹은 면이 복합된 형태, 중정을 둘러싼 벽에 의한 명확한 윤곽을 가진 형태, 수평슬래브에 의한 명확한 윤곽을 가진 경계면이 투명 유리로 된 상자형의 형태로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Mies의 변화와 그의 꾸준한 노력은 순수한 형태의 추구이었고, 동시에 건축가로서 방해가 되는 본질적이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나아가 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Mies의 명구 <보다 적은 것일수록 보다 풍부하다.(Less is more)>라는 말은 그의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절대적이고 완전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모순점도 있다. 로보트 벤츄리는 <적은 것은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저서 <근대 건축 에 대한 반발>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저질렀던 터무니없는 실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Mies는 우아한 무(nothingness)의 기념비를 만들어 내기 위해 철과 유리를 사용했다. 그것들은 아무런 내용이 담기지 않은 삭막한 기계 양식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Mies 자신의 순수 취향이 이러한 텅빈 유리(shell)의 수정과 같은 순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Mies 머릿속의 관념적인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대지, 기후, 기능 또는 내부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친근한 가능성을 배제한 채 거실에 배치된 형식적인 의자와 같이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강제적이고, 관료적인 정신의 신격화인 것이다. 그것은 Mies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휠씬 더 표현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Mies가 표현하고자 하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실현이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Mies van der Rohe는 한 시대를 풍미한 근대 건축의 거장이며 나는 그의 단순한 매스가 주는 명쾌함과 시원함이 좋기도 하고 어느 때는 변화가 없는 그의 작품의 모습이 싫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Mies의 생각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만으로도 Mies van der Rohe가 우리에서 주는 메시지는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Le Corbusier

CharlesEdouard Jeanneret.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스위스 출신의 불란서 건축가, 도시계획가.

근대 건축가들 중 Le Corbusier만큼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그의 사상과 작품을 흉내낸 다수의 건물들과 가구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롱샹의 교회당(The pilgimage church of Notre Dame-du-Haut; Ronchamp)>에서 그가 보여준 콘크리트의 아름다움은 마치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찱흙으로 집 만들었던 상상을 연상 시켜주는 것 같은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현실로 재현할 수 없는 상상 못할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그는 또한 건축 이외도 가구 디자인도 하였고 화가로서도 활동하였다.

* 어린 시절의 교육

그는 산으로 둘러싸인 스위스 쥐라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18세기부터 정밀시계의 세계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의 거친 자연환경과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적인 문화 환경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13세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시계문자판 에나멜 세공을 배우기 위해 라쇼드퐁의 에콜데자르데코라티프(장식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훗날 그가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불렀던 샤를 레플라트니에에게서 미술사, 소묘, 아르 누보의 자연주의 미학을 배웠다.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친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갈 길을 정해주고 그 지역 건축계획 실무를 처음으로 맡겼던 사람은 바로 레플라트니에였다. 스승의 충고를 따라 그는 1907~11년에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은 독학으로 건축을 배운 그에게 교육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두루 여행하면서 중요한 3가지 건축요소를 발견했다. 토스카나 지방의 갈루초에 있는 에마 수도원을 둘러보고 거대한 집단공간과 그의 주거건물 개념의 기초를 이룬 <개별적인 단위생활공간>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깨달았고,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 있는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16세기 후기 르네상스 건축과 그리스의 고대 유적에서는 고전적인 비례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와 발칸 반도의 민중건축을 통해 기하학적 형태를 발견했으며 빛의 처리와 건축적 배경으로서 조경(造景)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30세 때 파리로 이주했고 1년 뒤 그에게 세련된 현대예술을 소개해 준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을 만나면서 자신의 형식을 완성했다. 오장팡은 입체파의 난해한 추상개념을 거부하고, 일상적 사물이 가지는 순수하고 기하학적 형태로 되돌아간 자신의 새로운 회화미학, 즉 순수주의를 가르쳐주었다. 1918년 이들은 순수주의 선언인 <입체파 이후 (Apres le cubisme)>를 함께 집필하여 출판했다. 1920년에는 시인인 폴 데르메와 함께 비판적 전위예술 평론지 <에스프리 누보 (L'Esprit Nouveau)>를 창간했다. 훌륭한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예술과 인간애를 지향한 이 잡지는 아돌프 로스와 헨리 반 데 벨데가 이미 표현했던 건축 및 도시계획의 개념들을 제시했고 구조와 상관없는 정교한 장식과 과거의 <양식>에 맞서 싸웠으며, 기능주의를 옹호했다.

오장팡과 손을 잡은 르 코르뷔지에는 화가이자 저술가로서 새로이 발을 내딛었다. 오장팡과 르 코르뷔지에(이때까지도 잔레라는 이름을 썼음)는 필명으로 <에스프리 누보>지에 여러 글들을 함께 발표했다. 오장팡은 할머니의 이름인 소니에를 선택했고 잔레에게 아버지 쪽 조상 이름인 르 코르뷔지에를 쓰라고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잡지에 쓴 글은 한데 엮어져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나중에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Toward a New Architecture),1923>라고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이러한 문체는 오랫동안 논객(論客)으로 활동한 그의 특징이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와 <구부러진 거리는 당나귀가 다니는 길이지만, 곧게 뻗은 거리는 인간을 위한 도로이다>라는 2가지 말은 그가 남긴 유명한 선언이다. 그의 저술들은 다음 세대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성서 같은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 쓰인 사고의 본질적인 방향은 여행과 강연을 통해 생겨난 것으로서 45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유명한 저서로는 <도시계획 Urbanisme), 1925>, <성당은 언제 흰색이 되었는가 (Quand les cathedrales etaient blanches), 1937>, <아테네 헌장 (La Charte d'Athenes), 1943>, <도시계획론 (Propos d'urbanisme), 1946>, <3개의 인간시설 (Les Trois Etablissements humains), 1945>, <모듈러 (Le Modular I), 1948> 등이 있다. 그에게 <에스프리 누보>지는 실무를 시작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1922년에 사촌인 피에르 잔레와 함께 스튜디오를 열어 1940년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그의 작품의 두 시기 가운데 첫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두번째 시기는 1944년부터 1965년 죽을 때까지로 나뉜다.

* 제1기

1922~40년은 도시계획과 건축설계 계획안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온 시기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완공한 건물은 물론, 실행하지 않은 계획안들도 발표하자마자 곧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922년 <살롱 도톤>에 사회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고, 이 시기 모든 작품의 근본 사상을 담은 2개의 계획안을 출품했다. 이 가운데 하나인 <시트로앙 주택>은 5년 뒤 그가 근대건축의 개념이라 정의했던 5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즉 구조물을 받치기만 하고 건물 아래의 지면을 개방시키는 기둥, 주택에서 필수적이면서도 정원으로 바꿀 수 있는 테라스, 개방된 평면, 장식이 없는 정면, 구조틀과 독립적임을 나타내는 옆으로 긴 창이 모두 사용되었다. 내부는 개방된 스플릿 레벨(split-level:반 층마다 높이를 달리 한 것)의 거실공간과 셀 모양 침실이 전형적인 공간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출품한 한 도시의 축소모형은, 무리지어 있는 마천루의 기부(基部)에 있는 정원과 녹색공원 개념을 시대에 앞서 표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준(準)공식 전람회였던 <살롱 도톤>에서 시작했던 도시계획 개념을 발전시켜 1925년 파리의 장식미술 전시회 때 <새로운 정신(esprit nouveau)의 선언서>가 될 하나의 건축을 출품했다. 화가 페르낭 레제의 영향으로 내부 벽을 강렬하게 채색한 이 자그마한 복층 주거 안에 자신이 디자인해서 상업적으로 생산된 첫 번째 가구들을 전시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르 코르뷔지에의 사회적 이념은 2가지 형태로 실현되었다. 하나는 1925~26년 한 실업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르도 근처의 페사크에 시트로앙 주택양식으로 40가구를 갖춘 노동자 도시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 주택단지는 지역전통을 경멸하고 관습을 벗어난 색채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市) 당국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당국은 상수도 공급을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페사크 주거단지에는 6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으며 르 코르뷔지에는 이 모욕을 잊을 수 없었다. 1927년 그는 미적으로 가치가 높은 기능제품 생산에 관심을 가진 여러 집단의 모임인 <독일공작연맹>이 개최한 국제 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박람회를 위해 슈투트가르트 실험 주거지역인 바이젠호프에 2채의 주택을 지었다.

비록 그는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위한 건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로 개인주택을 의뢰했던 특권층 사람들을 위한 건물을 지었다. 그 주택들은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와 장식 없는 정면을 결합하여 기능적 디자인과 절제 있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1922년 오장팡을 위해 지은 주택을 비롯해 후에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재단(1968) 지부로 쓰인 스위스 수집가 라울 라 로슈 저택(1923), 야수주의와 입체파를 후원한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형제인 마이클 스타인 저택(1927), 푸르른 시골 풍경 속에 자리 잡아 가느다란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지어진 푸아시의 사부아 저택(1929~30) 등이 있다.

1927년 르 코르뷔지에는 제네바에 새 본부를 세우기 위해 국제연맹이 실시한 설계경기에 참가했다. 단열유리벽을 쓰도록 설계한 그의 계획안은 기능적 분석에 대한 건축가의 재능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한 예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치기구를 위한 건물로서 신고전주의적 신전 대신에 엄격한 기능 분석에 걸맞은 구조와 디자인을 한 사무용 건물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계획안은 미래에 탄생할 국제연합(UN) 관계 모든 건물의 전형이 되었다. 아마 설계경기의 규칙대로 먹을 사용해 그렸다면 1등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페사크에서 좌절을 겪은 그로서는 보수적인 심사원들이 꾸민 음모임이 거의 분명한 이러한 결격조항 때문에 공식적인 건축계에 더욱 실망했다. 그러나 그의 낙선과 함께 떠돈 소문으로 그는 근대적 전위건축가라고 알려지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제네바 사건에 따른 즉각적 조처로서 무엇보다도 근대 전위건축의 가치를 옹호할 목적으로 1928년 스위스의 라사라즈에서 근대건축국제회의(CIAM)가 창설되었다. 1930년경 이미 이 기구는 도시계획이론을 지향했다. 프랑스 지부장이었던 르 코르뷔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열린 5번의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제4차 회의에서 근대건축의 몇 가지 기본원리를 자세히 기술한 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두드러지게 활약했다.

또한 제네바 설계경기에서 얻은 명성 덕택에 남아메리카에 강연 차 여행을 떠나 이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과 도시계획의 기존 상태에 관한 소고 (Precisions sur un etat present de l'architecture et de l'urbanisme), 1930>를 썼으며 모스크바로도 여행하여 전위적인 구성주의 건축가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첸트로소유스 빌딩(1929~35) 설계경기에 당선했다.

그밖에 르 코르뷔지에는 이 기간에 2개의 주요건물을 건립했다. 하나는 파리의 구세군회관으로, 개방할 수 없는 유리면으로 인식되었던 벽에 공기조화장치를 설치해 <호흡하는>유리벽을 시도했다(기술적·재정적으로 실패함). 또 하나는 파리의 <대학도시>에 있는 스위스 학생 기숙사(1931~32)이다. 스위스 학생 기숙사에서는 일반 서비스 영역을 별개의 건물에 지정함으로써 거주영역을 분리하고 이 두 부분을 하나의 계단실로 연결했다. 표면은 대부분 마감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으며, 육중한 지주는 처음으로 조소적 가치를 표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적 기능주의는 표현의 욕구와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1930년대 말에는 알제시 종합계획(1938~42)과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종합계획(1938), 리우데자네이루의 교육보건부 청사(1936),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있는 필리프빌의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박물관(1938)과 같은 아주 유명한 계획안들을 내놓았다. 또한 당시 이미 명성을 얻은 미국으로도 여행을 다녀왔다(1935).

그가 펼쳤던 다양한 활동은 자신이 선택한 생활양식과 일치했다. 동료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교육자가 아니라 우두머리로서, 그는 혼자 자기 사무실에 파묻혀 일을 했으며, 협력자들은 사무실 밖의 기다란 작업장에서 작업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협력자들 중 몇몇은 나중에 유명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오후에만 사무실에 나왔다. 1925년 오장팡과 헤어진 후에도 화가로서 활동을 계속했고 오전에는 언제나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 중반까지는 몇 안 되는 훌륭한 평생친구였던 페르낭 레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 전쟁기간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으로 그는 건축 활동과 여행을 중단하고, 그와는 달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피에르 잔레와 20년에 걸친 협력관계를 마무리 지었다. 비록 그는 비시에 세워진 임시정부에 협력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 건설 중인 건물은 거의 없었고 그의 유일한 활동이라고는 그림그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깊은 사색뿐이었다.

그동안 그는 건축요소들을 인체에 비례하도록 하는 조화로운 치수의 척도인 <모듈> 개념의 첫 번째 기초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1950년 마침내 이 이론을 완성하고 그때부터 건물들을 <인간적 척도>로 통합시키길 바라면서 모든 건물설계에 이 개념을 적용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르 코르뷔지에는 전통건축의 옹호자들이 그에게 퍼붓는 비난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대중들에게는 건축의 피카소였던 그가 건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 제2기

르 코르뷔지에는 마침내 그의 계획이론들을 프랑스 재건설에 적용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45년 생디에 시와 라팔리스로셸 시 계획안을 작성했다. 보주 산맥에 자리 잡은 생디에 시 계획안에서는 파괴된 도시의 거주자 3만 명을 기능적인 5개의 마천루에 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안들은 거부당했지만 곧 전 세계로 퍼져 하나의 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는 쓰라림을 맛보았으며 더욱이 뉴욕의 국제연합 빌딩을 세우기 위해 설계를 직접 맡는 대신 그 건물 설계를 맡은 건축가들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지명되자 실망이 더 컸다.

프랑스 정부가 무제한으로 후원해준 덕택에 드디어 그는 대규모 (개인) 주거단지를 건설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르세유에 사회적 환경에 대한 그의 이상을 실현할 주거단지 건설을 맡았던 것이다.

<위니테 다비타시옹 (unite d'habitation)>으로 불리는 마르세유 계획안은 18층으로 된 수직 공동체 건물로 1,800명의 거주자들이 23개 유형의 복층(즉 스플릿 레벨) 아파트에 살도록 설계되었다. 일반 부대시설로는 건물 내부의 두 <거리>에 가게·학교·호텔 등이 있고, 옥상에 탁아소, 유치원, 체육관, 야외극장이 있다. 선반 속의 병들처럼 콘크리트 틀 구조 속에 층층이 집어넣은 개별 <빌라>처럼 느껴지는 이 아파트는 1952년에 완공되었다. 그밖에 프랑스의 낭트와 브리에, 서베를린에도 이 같은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는 또한 <종교예술지 (L'Art Sacre)>의 창간자이자 도미니쿠스 수도회 창시자인 쿠튀리에 신부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2개의 종교건물을 지었다. 이 가운데 한층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예배당(1950~55)은 그의 기능주의의 유명한 원칙을 만족시킨 건물이다. 시각 효과를 노린 벽은 2배나 두껍게 세웠으며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는 지붕도 실제로는 수많은 기둥으로 받쳐진 것이다. 이보다 야수적이고 금욕적인 작품이 리옹 근처 이뵈쉬르아르브레슬에 있는 생트마리드라투레트 수도원이다. 정방형의 이 건물은 자연 속에 있는 콘크리트 요새를 연상하게 한다. 3층으로 된 유리창 면에 서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먼저 창유리 세트를 <음악적인> 간격으로 배열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953년과 1962년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작품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국외에서 대규모 건물을 설계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이다. 1951년 인도의 펀자브 주 정부는 새 수도인 찬디가르 건설을 위해 르 코르뷔지에를 건축고문으로 지명했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도시계획 원리들을 거대도시 규모로 적용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지역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대법원, 국무부 청사와 의회의사당을 설계했다. 커다란 콘크리트 차양을 친 창문, 마감하지 않은 콘크리트, 조소작품 같은 정면, 급강하하는 지붕선, 기념비적인 경사로 등은 그의 건축의 주요요소였고, 곧바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1960)과 하버드대학교의 카펜터 시각예술 센터(1964)를 세웠으며, 그가 죽은 뒤 세워진 취리히 박람회관(1964)을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뒤늦게 인정받은 사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하고 박해받는 천재상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안들, 즉 프랑크푸르트 예술관(1963), 밀라노의 올리베티 컴퓨터 센터(1963), 스트라스부르의 의회의사당(1964), 브라질리아의 프랑스 대사관(1964)을 설계했다. 그는 1965년 수영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스스로 자신의 시대에 많은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르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1968년에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설립되었다.

공간의 3차원적 볼륨의 비례는 2차원적인 평면의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도출되는데 이러한 점은 꼬르뷔지에의 여러 작품에 일관된 흐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특히 꼬르뷔지에의 비례가 잡힌 매스와 공간을 규정해 주는 평면의 지배적 성격과 역할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은 초기 주택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자칫 꼬르뷔지에를 기능주의자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도 하지만, 실제로는 각 방들의 기본적인 배치와 그 규모가 기능상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한편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벽의 처리에 의해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게 된다는 점에서 건축의 가능한 한 모든 요소로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공간개념은 논리와 이성의 요소들이 감성적이며 미적인 요소들과 하나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구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창작활동에 이론적인 배경을 이루게 되는 구조개념은 최초의 주택을 지은 1905년에서 도미노 시스템(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에서 뼈대 위에 슬래브를 얹고, 또 그 위에 슬래브를 얹어나가는 개념)을 제안한 1914년까지의 10년간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그는 파리에 와서 페레 밑에서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베를린의 페터 베린스로부터는 철골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또 오토 바그너, 네덜란드의 베를라헤와도 접촉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는 연필과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아테네, 로마 등 지중해 연안의 건축을 탐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1917년에는 파리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입체파와 접촉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경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적용하여 대상의 내외부를 동시에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르 꼬르뷔제는 이와 동일한 방식을 건축에 적용하여 내외부 공간의 상호관입을 위한 방법을 개발해냈다. 이 내외부 공간의 상호관입은 보로미니와 구조기술자의 건축에 의해 이미 예시된 바 있다. 그는 오장팡과 함께 1918년에 회화분야에서 순수파를 창립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매스와 윤곽을 서로에게로 흘러 들어가 상호관입하게 되는 부유하는 듯한 투명한 대상을 좋아하고 있음을 표방하였다.(순수파는 입체파와 네덜란드의 디 스티에 운동의 추상적 회화와 관련이 있다.) 1920~1925년 사이에 르 꼬르뷔제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정기간행물을 간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미학에 대한 원리를 발전시켜나가서 이를 1923년에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특히 그가 페레의 사무실에서 잠시 근무했던 1908년의 경험은 그의 건축 활동에 새로운 차원을 갖게 했다. 이 사무실에서 그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관한 기초를 터득한 이외에도 고전건축의 질서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페레와의 접촉에서 꼬르뷔지에는 철근콘크리트가 미래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는데. 페레는 꼬르뷔지에게 비욜레 르딕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합리주의 건축철학을 고취시켰고 구조를 적절히 디자인하기만 하면 쉽게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자들의 논리를 접하게 했다. 또한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내구력이 있고 경제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골조가 고딕구조의 중심사상과 고전주의적 형식의 인문주의적 가치관과의 대립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접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꼬르뷔지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역학적 효용성을 파악하게 되었고 철근콘크리트에 의한 합리적인 건축의 생산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되어 1915년 자신의 조형적 특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막스 뒤브와 함께 일련의 철근콘크리트 시스템을 구상했는데 이러한 시스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미노 시스템은 경제성과 견고성, 그리고 시공속도와 질에 중점을 두고 개발된 것으로써, 그가 1920년대에 맞이하게 될 획기적인 도약의 디딤판이 된 동시에 꼬르뷔지에 건축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 도미노 시스템상에서 골조의 각 치수는 그 기둥의 배치상태가 좋음에 따라서 내부공간에 무수한 조합을 가능하게 하고 외벽에서는 의도한 만큼의 채광이 주어질 수 있었으므로 건축조형에 새로운 차원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르 꼬르뷔제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면서 인체의 형상을 건축의 형태로 실체화시키는 방법을 발견해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진정으로 의미 깊고 표현력이 풍부한 인본적인 건축을 창조해 냈다는 점이다. 1920년대 르 꼬르뷔제의 건물은 극적으로 표현되어진 활동을 담기 위한 긴장에 찬그릇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건물들은 독립적인 조각작품처럼 처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조각작품이 지니는 동적인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인체로부터 유추되는 근육적인 특성도 지니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도 못하였다.

르 꼬르뷔제 작품의 두 번째 발전단계는 1930~32년 사이에 지은 스위스 학생 기숙사에서 보여진다. 여기에서 르 꼬르뷔제는 2개의 상반되는 요소를 결합시키고 있다. 이 건물의 필로티 중 일부는 조소적이고 근육적으로 되어 있지만, 그 위의 박스 형태의 방들은 마치 공간을 에워싸는 얇은 막처럼 표현되고 있다. 1931년의 소비에트 궁전을 위한 계획안에서는 내용물을 감싸고 있는 표피의 개념이 완전히 버려지고 있다. 르 꼬르뷔제는 이 건물을 머리, 어깨, 허리, 엉덩이 등을 갖는 인체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전체의 매스를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이 건물은 아프리카의 조각 작품처럼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미지가 기이한 모습으로 떠오르고 있다. 1952년에 완성된 마르세이유 아파트에 이르면 그가 동적인 기념물을 만들기 위해 추구했던 모든 독창적인 요소들이 최종적으로 서로 결합되어지게 된다.

* 르 꼬르뷔제의 주거의 4형식

제 1형 : 이 형식은 유기적 이유로 인접물의 옆에 나타나는 각 기관의 연결로 된다. 각기 유기적으로 연결된 매스로써 내부공간의 주위를 그저 그대로 벽면으로 덥는 방법인데 여러 가지 돌출부를 취하여 외부에 보인다. 이 원칙은 거대한 구성으로 이끌어지나 만일 감시를 게을리 하면 변화의 과잉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 형의 예로는 라로슈(La Roche)의 집이 있다.

제 2형 : 절대로 순수한 피봉속에 기관을 틀어넣는 것을 말한다. 곤란한 과제지만 이것은 아마 정신의 쾌락을 의미한다. 또 과해진 틀 안에서의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 예로는 가르슈(Garches)의 집이 있다.

제 3형 : 외부로 노출된 독립뼈대에 의하여 단순 명쾌하게 마치 아네트모양 투명한 외피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각 층마다 변화시켜 각 실의 유효한 면적을 그 형태와 수량에 의하여 정할 수 있다. 극히 용이하며 수단이 풍부한 구성, 예로는 슈튜 트가르트(Stuttgart)의 집이 있다.

제 4형 : 외부에서는 제 2형의 순수한 형태를 나타내고 내부에서는 제 1형과 제 3형의 특징과 장점이 허용된다. 순수하고 극히 일반적이며 또 수단이 풍부한 형, 예로는 사보아(Savoye)주택이 있다.

* 현대 건축의 5형식으로 본 르꼬르뷔제

필로티(les polotis) : 철근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의 발달은 구조체로서의 벽이 유지하고 있 었던 기능적 필연성을 제거하고 콘크리트와 철골기둥으로 구조체를 대신 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발달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지면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주었고 이 같은 생각은 꼬르뷔제의 경우 상당히 일찍부터 나타내고 있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꼬르뷔제는 지면으로부터 4-5m 위에 조립한 격자 위에 얹은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도시계획에서 선언한 <지면에서의 해방>은 그 구성의 결론이다. 시트로앙 주택계획 에서는 가구의 다리와 같은 필로티가 <거주하는 상자>를 지탱하고 있는데 이러한 건축은 지구 위의 어디서나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호상도시>로까지 확대 될 수도 있었다. 1929년에 이르자 꼬르뷔제는 이 같은 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하여 모든 지면은 사람들의 활동과 식물에게 할애되어야 하며 일과 거주를 위한 공간은 지면 위에 자리 잡으면 된다고 제안했다. 꼬르뷔제는 1929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서 이 같은 구상을 찬란하고 명석한 형태로 실현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53년 낭트 레제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이 같은 구상을 관철시켰다.

뼈대와 벽의 기능적인 독립(La Fenetre en Longeu) : 꼬르뷔제가 제안한 도미노 시스템은 파사드의 폭 안에서 창의 가로 폭은 무제한으로 확정될 수 있다는 특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실내공간을 한결 같이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트로앙주택 이나 바이센호프주택에서 이 같은 창들은 필로티 위에 얹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국제연맹본부 계획안에서는 길이 200m에 이르는 가로로 긴 창이 선보이게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vre) : 지금까지 건축평면은 구조 벽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14-1945년에 걸쳐 꼬르뷔제는 건축의 참된 유연성을 추구하였다. 즉 내부 공간 의 구성을 사용자의 자유에 맡긴다는 사고방식은 1932년 알지에의 오뷰 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바이센호프 주택에서 꼬르뷔제는 가동식 칸막이를 도입해서 야간에는 거실을 3개의 작은 침실로 바꿀 수 있게 처리했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난 자유로운 평면의 개념은 단지 주거공간에 참다운 가동성을 확보한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의지를 관철시키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자유로운 건물 정면(Le Facade Livre) : 자유로운 파사드의 건축원리는 독립되어 구상된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의 네 가지 원리의 준수에 뒤따르는 조형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파사드의 구상원리는 미스의 경우처럼 완전한 유리 상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꼬르뷔제의 경우 파사드란, 회화의 화면과 마찬가지로 항상 개구부와 비개구부로 질서가 부여되어야 하는 면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옥상 정원(Le Toit-Terrasse) : 옥상테라스의 장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꼬르뷔제는 주로 실용적인 이유를 들었다. 그에 의하면 옥상테라스의 장점은 눈이 많은 북유럽 지방의 경우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의 누수의 위험 없이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때 물이 집의 중심을 향해 흐를 수 있지만 이 물은 주택 내부에서 오르는 열이 있기 때문에 동결의 위험은 없게 된다. 여기에 엷은 층의 흙을 덮어둘 경우 옥상테라스는 언제나 적당한 습기가 유지되어 식물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주거공간을 추위와 더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 이 같은 옥상 테라스의 초기개념은 이후의 작품인 사보아주택에 이르러서는 보다 조형적인 세계로 귀결되어 선박의 이미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유럽각지의 유니테다비타시옹의 옥상이나 샹디갈의 사무동과 회의동 옥상에서와 같이 <빛 아래 집합된 입체의 교묘하고도 장려한 연출>로 승화되어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풍요하게 해주고 있다.

* 근대와 현대건축에서의 모듈의 발전

건축 재료의 크기에 의해 정해지던 모듈의 개념에 새롭게 접근한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다. 그는 모듈 본래의 사고방식인 비례의 개념에 황금비의 중요성을 찾아내고 자신의 모듈에 <모듈러 (Modulor)>라는 새로운 단어를 붙였다.

cf. 모듈의 정의: 모듈(module)이란 측정 단위 또는 공작물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직사각형을 모듈로 하여 지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모듈러 디자인이라고 한다. 모듈러 디자인은 역사적으로 그리스 건축에서 비롯했다.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 하부의 굵기를 1모듈로 하여 다른 부분을 그 치수와 비례하도록 만든 것이 모듈의 초기 발생 형태다. 이것은 비례를 기술적으로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듈이라는 말을 <황금분할>과 관계시켜 새롭게 해석한 것이 꼬르뷔지에의 모듈러이다. 이 개념의 발상은 근대사회를 보는 꼬르뷔지에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인데, 그는 근대사회의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표준화와 프리패브리케이션(미리 만들어 조합하는 방식. 도미노 시스템 주택을 위한 철근콘크리트의 골조)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잇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주택의 대량생산이라는 사회적 당면과제를 풀 수 있는 프리패브리케이션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치수시스템에 입각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켰고 1948년 모듈러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 모듈러이론의 한계

모듈러는 그의 처음 의도대로 조립식 공법을 위한 특허를 얻어내지는 못하였고 또 이후 공업화 건축의 원리로 대중화되지도 못하였지만, 그 자신의 작품들을 분석할 때는 항상 이 규칙들을 토대로 하게 된다. 여기서도 유의할 점은 건축의 형태에 대한 어떠한 규칙체계도 건축의 좋은 질을 보장해 주는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건축, 미학 뿐 아니라 건축에 관한 모든 이론이,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시 해주겠다고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쉽게 도달하게 해주는 충분한 공식이 될 수는 없다.

그의 위대성은 단순한 건축이론의 주창에 그치지 않는다. 1922년 <3백만 도시계획>에서 도시의 기능별 배치, 도로와 교통망의 재구성과 용지의 절약, 환경과 서비스의 개선을 위한 고층형의 채택 등에서 새로운 도시 형태를 제안하였으며, 이런 주장들은 실제로 인도의 샨티가알의 캐피탈 농에서 실현하기도 하였다. 국제연맹회관 현상설계 예심에서는 1등을 한 그가, 최종 심사에서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 다음 해인 1928년 현대건축지지자들의 국가를 초월한 모임(CIAM)을 주도하고 과거회귀주의와의 투쟁과 인간생활의 정신적, 물질적 욕구추구, 인간 활동과 자연환경과의 조화 육성 등의 문제해결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 르 꼬르뷔지에가 견지한 건축사상

합리주의적 사상과 낭만주의적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건축형태의 근원으로써 르 꼬르뷔지에가 응용하고 있는 공간관은 큐비즘과 미래주의에 영향받은 것으로, 사물에 일반적 관심을 던져준 큐비스트들과 공간을 인접한 대상물들이 침투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미래주의자들의 공간개념이 꼬르뷔지에에 의해 건축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공간은 무한하며 어떠한 구속없이 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둘째, 공간은 모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나 기하학에 의해서 치수가 결정되며 인식된다. 일반적인 구조는 장방형이며, 건축은 3차원적인 크로스 워드 (Cross Word)와 같이 어느 부분은 비어 있고 어느 부분은 꽉 차있어 이 양자간에는 명확한 선이 나타나게 된다.

셋째, 관찰자와 매우 특수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관찰자와 공간의 어느 한 쪽은 이동한다는 유동적 공간개념이다.

이상과 같은 공간개념과 형태구성원리을 기초로 하여 공간의 볼륨이 구성되는데, 공간의 볼륨을 구성하는 요소로 꼬르뷔제는 벽을 선택한다. <공간은 빛을 받아 자신을 드러내는 벽에 의해서 연출되는 볼륨으로 형상화되며, 따라서 벽은 내부공간의 형태를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했다. 이처럼 벽이 내부공간의 볼륨을 결정하게 되면서 평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는 <평면이 매스와 표면의 구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생성자(Generator)의 역할을 함으로써 건물은 매스와 공간의 비례가 적절하게 조화된 감각과 더불어 만족감을 주게 된다>고 하였다.

언젠가 르 꼬르뷔제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건축은 시대정신의 산물입니다... 건축은 공간이며, 폭이며, 깊이이며, 높이이며, 체적이며, 동선입니다. 건축은 인간의 착상입니다. 건축은 머릿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그 디자인을 그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면이란 단지 여러분의 생각을 건축주나 시공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건축의 모든 것은 평면과 단면에 있습니다. 평면과 단면을 통해서 살아 숨 쉬는 실체가 얻어지면 입면은 자연히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며, 여러분이 디자인 센스를 조금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입면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주택의 본래 목적은 그 안에서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입면 역시 성공적으로 디자인되어야만 훌륭한 건축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많은 상상력 역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쉬울수록 상상력은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건축은 구성입니다. 여러분은 제도판 위에서만 작업을 하는 양식주의자가 아닌 구성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 Alvar Aalto

Hugo Alvar Henrik Aalto

유럽 근대건축하면 떠오르는 건축가들은 대게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나 르 꼬르뷔제(Le Corbusier)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국적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붙지 않는다. 그러나 알바 알토의 경우는 다르다. 알바 알토를 말할 때면 언제나 핀란드라는 나라와 연관지어서 이야기 하게 된다.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그 두 나라의 식민지로 한동안 유럽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시 유럽은 신 고전주의에서 막 벗어나 민족적 낭만주의를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핀란드는 1917년 독립을 하게 되는데, 알바알토의 건축가로서 출발의 시기가 이와 비슷하며, 이로 알바알토의 초기 작품들은 약간 신 고전주의적 성향을 띤다.

알바 알토의 자라온 배경을 보면, 알토의 외할아버지는 삼림관(forester)이었고, 아버지는 측량기사(surveyor)였다. 삼림관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인문과학, 자연과학에 모두 능통했던 당시 인텔리겐차였으며, 일에 필요한 도구들을 직접 발명해서 사용했으며 건물을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이 점이 알토로 하여금 건축가가 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알바 알토의 건축의 특징

첫째로, 알바 알토의 건축을 보면 흰색에의 집착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빛에 대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핀란드는 유럽의 북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구의 긴 겨울의 짧은 낮 동안 햇빛을 실내로 최대로 반사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의 예로는 비푸리 도서관(Viipuri Library)이 있다.

두 번째로, 자연재료의 사용이다. 알토는 20세기에 풍부한 철과 콘크리트의 사용을 가급적 거부하며 인간에게 친밀감을 주는 재료, 목재와 붉은 벽돌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삼림관이었던 그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미친 부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를 통해 나무와 많이 접촉함으로써 나무라는 재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나무는 핀란드의 유일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영역을 개척하고 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알토는 인간의 육체적, 정서적 요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 중심의 건물을 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바 알토를 생각할 때 대비적으로 떠오르는 건축가는 르 꼬르뷔제이다. 알토의 건축과 꼬르뷔제의 건축을 비교해 보면, 대체적으로 정 반대의 접근형태를 볼 수 있다. 건축에 있어서 공간을 플러스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과 마이너스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있다면, 플러스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알토의 건축이고, 마이너스 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 르 꼬르뷔제의 방식이다. 다시말해 르 꼬르뷔제는 설계를 할 때 외관을 먼저 디자인을 하고, 그 안에 공간을 형성해 가는 방법을 쓴다.

그 반대로 알토는 내부의 관계를 먼저 고려한다. 예를 들어, 방과 부엌, 그리고 거실 등의 실들이 어떤 관계에 있고, 어떤 크기가 되어야 실용적인지를 먼저 고려하여 원심적으로 공간을 형성해 간다.

이런 의미에서 르 꼬르뷔제의 건축은 기념비적이고 조형적이지만, 내부 기능의 변경에 대한 대응이 힘들다. 하지만 알바알토는 내부에서 질서를 정리해 가는 방식이므로 내부의 자연스런 증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바알토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가서 살아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넷째로, 알토의 작품에는 유동적, 파동적인 곡선체계가 있다. 이는 핀란드의 국토의 8%를 차지하는 호수들의 선에서 나온 것이다. 알토는 측량기사인 아버지의 작업대 위에 펼쳐진 지도들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구불구불한 호수 라인에 익숙해 질수 있었다. 이것의 예는 뉴욕 만국 박람회의 핀란드 관과 베이커하우스(Baker House)가 있다.

다섯 째로, 알바 알토는 가구에서부터 모든 건조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1928년에는 자신의 후원자인 굴릭센 부인과 자기 부인과 셋이 아르텍(Artek)이라는 가구회사를 설립하기 했다.

*알바알토의 건축활동시기 3부분.

첫 번째는 23년도, 즉 알토가 막 건축가가 되어서 유바스킬리아(Jyvaskyla)에 건축사무소를 설립한 때부터 그 사무소를 투르크(Turku)시로 옮기기 전까지 이다.

이 당시 핀란드의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공모전에 참가를 하고, 당선이 되는 식으로 일을 하였는데, 알토오 같은 루트를 밝아 당시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닥치는 대로 참여를 하였다. 초기엔 실패도 많았지만, 점점 당선되는 작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23: Finnish Houses of Parliament Competition - fail

1926: World Headquarters Competition for the League of Nations - fail

1927: Jyvaskyla Civil Guard House 2등

Competition for the Agricultural Cooperative of Southwestern Finland 1등

1927: Toolo Church of Helsinki, Viinika Church in Tampere, Taulumaki Church in Jyvaskyla - fail

그 외로 한 작품들은 Railway Employees Housing(1923), The Worker's Club in Jyvaskyla(1924), Civil Guard House in Seinajoki(1925), Villa Vainola in Alajarvi(1926) 등이 있다. 이때는 신고전주의의 영향이 약간 남은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사무소를 투르크로 옮기고 나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은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시기의 최초의 작품은 Turun Sanomat Newspaper Plant and Offices(1928-30)이고 그 뒤를 이어 파이미오 요양원 (Paimio Sanatorium, 1929-33)과, 비푸리 도서관(Viipuri Library,1933-35)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Turun Sanomat Nespaper Plant and Office는 핀란드 바깥으로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진 근대건축의 첫 번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에는 르 꼬르뷔제의 5가지 개념이 적용이 되었다.

파이미오 결핵 요양원은 알토에게 20세기 건축사에 확고한 위치를 주었다. 이 건물은 핀란드에서는 처음으로 기능주의를 정착시킨 건물이다. 당시 유럽은 전역에 걸쳐 병원이란 곳이 매우 비인간적인 환경으로 되어있었는데, 알토는 이런 전형에서 벗어나 병원에 있는 환자든, 일을 하는 사람이든 그 안에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적의 환경을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예로 건물이 하루종일 최대한의 일사를 받을 수 있도록 배치가 되었으며, 병동의 최상층에는 휴게용의 테라스가 있고, 환자들의 심리상태를 고려한 활기 넘치는 색채계획까지 되었다. 또한 가구 및 병원 집기에 이르도록 알바 알토가 디자인하여, 아주 세세한 곳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건물은 핀란드로서 처음으로 환자와 환경을 고려한 건축의 시대를 열었다.

비푸리 도서관은 강의실, 아동 도서실, 열람실등을 갖춘 시립 도서관이다. 전체 흰색으로 마감된 것을 몰 수 있다. 이 건물에서는 빛의 지배적인 역할을 볼 수 있는데, 도서관의 열람실에 그 어떤 부분에도 그늘이지지 않도록 자연광을 원통형의 굴뚝 스카이라이트를 통해 확신이 되도록 하였다.

도서관 1층에는 긴 형태의 강의실이 있으며, 2층에 열람실과 도서실이 있다. 1층에 있는 강의실은 길죽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뒷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강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알토는 이런 음향상 불리한 공간 속에서 각 좌석에서 하는 발언의 음성이 골고루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 천정을 반사판으로 사용해서 파형을 취하였다. 이 건물은 음향처리를 완벽하게 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비푸리 도서관은 알토의 나중 작품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특징을 보면, 강의실 천장에서 볼 수 있는 파동치는 형태가 하나이다. 그는 이것으로 물결모양의 다이나믹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은, 이 물결보양의 천장을 위해 사용한 폭이 좁은 판(laminated wood)이다. 이로 알토는 철과 콘크리트, 유리 등의 재료를 써온 근대건축 가운데 목재가 갖는 매력을 부활시켰다.

알토 건축활동의 세 번째 시기는 이 비푸리 도서관이 완성된 35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비푸리 도서관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빌라 마이레아(Villa Mairea, 1937-38), 뉴욕 만국 박람회의 핀란드 관(Finnish Pavilion for the New York World's Fair, 1939), 그리고 베이커 하우스(Baker House, 1946)가 있다.

빌라 마이레아는 알토의 평생 후원자인 굴릭센 부인을 위해 지은 주택이다. 구조는 목구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외벽이나 천정에 폭이 좁은 널을 사용하였고, 바닥이나 계단 마저도 목재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목조가 아닌 건물에 이만큼 목재라는 소재의 질감을 공간속에 교묘하게 살린 건물은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건물의 안은 한번 바뀌게 된다. Proto-Mairea 라고 불리는 처음안은 굴릭센 부분의 요구에 맞춰서 계획을 하였다. 지하실을 포함하여, 벽난로가 있는 홀, 거실, gentlemen's room, Ladies' room, 서재, 음악실, winter garden, 탁구실, 미술실, 접견실, 일하는 사람들 방, 세 아이들의 각자의 방, 그리고 부부 침실까지 알토가 보기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실들이 엄청 많은 안이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안을 짰는데, 이 안에서는 불필요한 자잘한 실들을 모두 하나의 다목적실로 통합하였다. 굴릭센 부인이 미술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그 실은 나중에 전시회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계획하였다.

이 주택은 ㄱ 형태를 취하면서 거실과 회랑이 주요공간이 되고, 현관 식당이 1층에 배치된다. 거실의 맞은 편에 사우나와 수영장을 만들어 ㄷ 형태를 취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가운데 안뜰이 형성되게 하였다. 이것은 알토의 건축에 가끔 나오는 특징으로, 대지형태에 맞춰, ㄱ,ㄷ, ㅁ의 형태로 건물을 앉히고 그 가운데 안뜰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자연을 대지 안으로 끌어들이는 형식이다.

뉴욕 만국 박람회의 핀란드 관에는 비푸리 도서관의 강의실 천장에서 사용되었던 물결치는 형이 벽에 적용 되었다. 이것이 그때 성공을 하여 알토의 이름이 미국에서 일약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 파형은 후에 미국의 MIT 대학교의 기숙사에 사용되게된다.

MIT 대학교의 학생 기숙사, 베이커하우스라고도 불린다. 이 건물 역시 벽면이 곡선으로 휘었다. 이렇게 디자인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건물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찰스 강이다. 많은 학생을 수용하면서 기숙사에 거하는 어느 학생이나 그 건물이 길게 펼쳐졌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고, 찰스 강의 환희 트인 조망을 감상 할 수 있게 디자인이 된 것이다.

실내부를 회벽으로 마감하지 않고 붉은 벽돌의 건친 면이 그대로 노출이 되게 하여서 다시 한번 그의 자연재료 사랑을 확인 해 볼수 있다.

1950년대 이후의 그의 건축에 흥미있는 공간테마가 생겼다. 공간의 절단과 연속이다. 전동벽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는 유바스킬리아의 교육대학의 강당에서 먼저 채용되었다. 큰 평수와 중간 평수의 교실 사이의 벽을 트면 강당으로 사용 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나중에 이마트라에 있는 보크세니스카 교회에 적용이 된다.

보크세니스카 교회(Vuoksenniska Church)의 평면은 비대칭이다. 핀란드의 종교는 기독교의 루터파가 대부분인데, 제단의 중앙이 아니고 옆에 구석에서 설교를 하는 이 형식을 더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내부는 원호와 직선의 전동식 벽 2개를 사용하여 공간을 3개로 나눌 수 있다. 제단에 가까운 부분은 예배 전용이며, 다른 두 부분은 의식의 규모에 따라 자유로이 공간을 줄이거나 늘여서 사용할 수 있다.

이 교회의 천장도 약간의 곡선이 있으며, 창문은 경사가 졌는데, 이 역시 음향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다.

알바 알토는 핀란드뿐만 아니라 금세기 건축사에 남는 이름이다. 알토의 작품들을 보면 언제나 일관된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지켜옴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해 오랜시간, 아주 많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훌륭한 건축가로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김수근